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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ORY/fiction

어느 암살자의 탄생. 프롤로그.

아무튼 남자는 잠시 당혹해했다.

녹슨 듯한 위엄이 너무나 자연스럽게 스며 나오는 그녀가
우아한 팔동작으로 그 새하얀 손을 사용해서
남자의 눈 앞에 사탕을 내미는 것을 멍하니 보는데
그 내민 사탕의 높이가 남자의 턱 바로 아래쪽 그리고
미묘한 거리를 유지하며 어색하게 위치하여
순간 이 사탕을 손으로 받아야 하는 것인지
입을 벌리고 입안에 넣어주기를 기다려야 하는 것인지
망설여졌던 것이다.

찰나의 고민이 지나고 남자는
죄송하다는 말과 함께 사탕을 먹지 않는다고 사양했다.

그러자 그녀는 부드러이 들고 있던 팔의 방향을 선회하여
사탕을 자신의 입에 넣고 오른쪽 볼로 달그락 소리를 내며 옮긴다음
'아쉽군요.' 라고 말을 해 다시한번 남자가 당황해 하도록 만들었다.

순간 번개가 번쩍이며 둘 사이를 새파랗게 갈라 놓았다.
두번째 번개가 칠 때 남자는 속으로 숫자를 세기 시작했다.
여덟 아홉에 이르렀을 때 천둥소리가 울리고
9초만에 천둥이 치면 구백미터 밖에서
구름이 충돌한 것인지 벼락이 내려친 것인지 고심하고 있을 때

여자는 입에 문 담배에 불을 붙이며 자신은 천둥소리는 괜찮은데
번개가 치면 몸이 찢어지는 듯한 느낌이 들면서 무서워진다고 했다.

'와인 한잔 하실래요? 좋은 건 아니지만 비가 오기 시작하면 몸이 추워질거예요.'
남자가 건네 받은 와인을 코에 가까이 하며 이건 와인이 아니라 꼬냑이라고 하자
'비운의 와인이죠. 마치 버번같이. 마치 당신 같기도 하고' 라며 잔을 들어 보인다.

다섯잔의 꼬냑을 마신 남자는 취기가 제법 올랐고 어느새 밖은 내리는 비로 장막이 펼쳐져 있었다.

섬세할 것 같았던 여자의 손길은 답답할 정도로 거칠었고
남자가 그 거칠음에 맞추기 위해 안간힘을 다 써서
자신의 유희는 거의 다 잊어갈 때 쯤 여자가 내뱉듯 몽롱한 목소리로 말했다.

'당신은 진짜가 아냐. 위스키도 될 수 없고 와인도 될 수 없는 세컨. 그래 파생품일 뿐이야.'
늘 생기는 찌꺼기를 다시 활용한 존재. 그래 바로 그게 당신이야.'
그래서 어쩌라는 거냐고 묻자. 여자는 묘한 미소를 입술에 올리면서
'어쩌라는 거냐라는 말도 당신이니까 할 수 있는 말이겠지. 찌꺼기가 무대에 올랐으니
뭘 해야할지도 모르고 스스로도 움직이지 못하네. 그렇게 다른데다 물어 볼 수 밖에 없으면
차라리 죽어. 그냥 없어지는게 더 나아.'

순간의 정적. 남자는 눈동자 하나 움직이지 않고 동작을 고정시켰다.
그리고 잠시 후 여전히 몽롱한 목소리로
'당신은 진짜가.. 아냐.' 라는 말의 운율에 맞춰 남자는 손을 움직이기 시작했고
남자의 움직임이 멈췄을 때 여자의 소리도 멈췄다.

남자가 천천히 옷을 입고 냉장고에서 물을 꺼내 한모금 마신 다음
여자를 침대에 반듯하게 눕혀 시트를 덮어 준 다음
가스 스토브를 켜고 플라스틱 파이프 몇개를 자르고
현관에서 여자의 우산 중 어두운 색 한가지를 골라 손에 들고
엘리베이터를 내려 여전히 빗줄기로 굵은 장막이 드리워진 세상으로 나가며 남자가 말했다.

'난 버번이 더 좋아.'


오분 후 도시는 소방차 사이렌 소리로 가득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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